맨위로가기

남한 (십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한은 917년부터 971년까지 존재했던 오대십국 시대의 국가로, 현재의 광둥성, 광시성, 하이난성 일대를 지배했다. 유은의 후손들이 건국했으며, 문관 중심의 정치 체제를 특징으로 했다. 917년 유엄이 황제를 칭하며 독립했고, 918년 국호를 한으로 변경했다. 유엄 사후 계승 다툼과 환관들의 권력 장악으로 국정이 혼란해졌고, 971년 송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한 - 박당강 전투 (938년)
    박당강 전투는 938년 응오꾸옌이 쇠 말뚝을 박은 박당강에 남한군을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베트남의 독립 기반을 마련한 전투이다.
  • 홍콩의 역사 - 영국령 홍콩
    영국령 홍콩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으로, 아편 전쟁을 거치며 홍콩섬과 주룽반도가 할양되고 신제 지역이 조차되어 영토가 확장되었으며, 일본 점령기를 제외하고 무역항이자 금융 중심지로 발전하다가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어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 홍콩의 역사 - 베이징 조약
    베이징 조약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후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불평등 조약으로, 톈진 조약 비준 강요, 영토 할양 및 배상금 지불을 통해 청나라 주권을 훼손하고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심화시켰으며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광둥성의 역사 - 애산 전투
    1279년 애산 전투는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가 남송의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마지막 황제 소제가 자결함으로써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나라의 중국 통일을 완수한 해전으로, 중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 광둥성의 역사 - 남월
    남월은 기원전 203년부터 기원전 111년까지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존재했던 조타가 건국한 고대 국가로,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한무제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한족과 월족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남한 (십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통칭남한
시대오대십국 시대
지위제국
정부 형태군주제
수도광저우(흥왕부)
공용어중국어 (중세 중국어), 월어(중세 월어)
역사
성립917년
소멸971년
주요 사건"월"에서 "한"으로 국호 변경 (918년)
이전당나라
이후송나라, 오조
통치자
군주 칭호황제
황제유암(고조) (917–941), 유분(상제) (941–943), 유성(중종) (943–958), 유창(후주) (958–971)
기타 정보
현재 국가중국, 베트남
통화알 수 없음
지도
남한 (진한 파란색)
남한 (진한 파란색)

2. 역사

유은(劉隱)은 당나라 시대 중앙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관료들의 후손, 또는 전란을 피해 온 인사들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 지역에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남중국해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 궁정은 매우 사치스러워졌다.

그러나 942년 유엄(劉龑) 사후 계승 다툼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유엄의 셋째 아들 유분(劉玢)이 뒤를 이었으나, 곧 동생인 유성(劉晟)에게 살해되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다른 동생들을 모두 죽여 제위를 안정시켰고, 북쪽 초의 내란을 이용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유성은 죽인 동생들의 아내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 등 불량한 행동을 하고, 공신들을 죽이고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는 등 내부가 부패했다.

958년 유성이 죽고 장남 유창(劉鋹)이 뒤를 이었으나, 유창은 의심이 많아 문관을 죽이고 그 자리를 모두 환관으로 채웠다. 유창 시대의 남한 조정은 거의 환관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이반했고, 971년 송의 침공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유창은 보물을 10척이 넘는 배에 싣고 도망치려 했으나, 신임했던 환관에게 빼앗기고 송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 영토도 송에 의해 병합되었다. 병합 당시 남한의 영토는 60주 214현, 호수(현재의 가구 수)는 170,263이었다.

유창을 비롯한 일족은 개봉으로 옮겨져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유창은 송의 좌천우위대장군(左千牛衛大將軍)이 되었고, 사후에는 남월왕(南越王)으로 추봉되었다.

2. 1. 건국

유은(劉隱)의 선조는 한(漢) 왕실의 측족 후손이라고 자칭했다. 유은은 하남 상채 사람이었으나, 조부 대에 복건으로 이주하여 남해 무역으로 이익을 얻어 현지의 유력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유지겸(劉知謙) 때 광주로 이주하여 황소(黃巢)의 난에 공을 세워 봉주 자사(刺史)가 되었다.[1][2]

유은은 아버지의 죽음 후 그 지위를 계승하여 자사가 되었고, 정해군(靜海軍) 절도사(節度使)(광동·광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이용하여 904년에 정해군 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광동 전토와 광서 일부를 지배하며, 당의 멸망과 함께 자립 태세를 강화했다. 또한 남해 무역의 이익을 바탕으로 광동·광서에 세력을 확장하여 반독립 세력화되었다. 이에 당시 중원 세력인 후량(後梁)은 909년에 그를 남평왕(南平王)으로, 911년에 남해왕(南海王)으로 임명했다. 유은은 남해왕에 임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뒤를 이은 그의 동생 유염(劉龑)은 917년에 황제(皇帝)를 자칭하며 완전히 독립했다. 국호는 처음에는 “대월(大越)”이었으나, 예전 전한(前漢)·후한(後漢)·촉한(蜀漢)을 세운 유씨와 같은 성씨였기에 918년에 “한(漢)”으로 개칭했다. 남한(南漢)이라는 명칭은 다른 정권과 구별하기 위한 후대 역사가(歴史家)의 명명이다.

2. 2. 영토 확장과 대외 관계

904년 유은은 정해군 절도사가 된 후 광동 전지역과 광서 일부를 지배하고, 당나라 멸망과 더불어 자립할 준비를 하였다. 남해 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토대로 광동, 광서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 세력화되었다. 후량909년 그를 남평왕(南平王)에, 911년 남해왕(南海王)에 임명했다.[4]

917년 유엄은 황제를 칭하고 완전히 독립했다. 국호는 처음엔 대월(大越)이라고 했으나, 918년 전한, 후한을 건국한 유씨(劉氏)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한(漢)이라고 고쳤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고 제위를 안정시킨 뒤, 북쪽의 초나라의 내란을 틈타 출병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남한의 영토는 현재의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의 해안 지역과 하이난섬(海南島)까지 뻗어 있었다. (閩), (楚), 남당 왕국들과 더불어 비한족 국가인 달리(大理)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945년과 951년에 남당이 각각 민과 초를 정복한 후, 남당은 남한의 북쪽 국경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호 목판화에 묘사된 938년 백등강에서 남한군과 싸우는 오권(Ngô Quyền)


9세기 후반 당나라가 약해지면서 베트남의 여러 군벌들이 정해(베트남 북부)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남한은 931년과 938년 두 차례에 걸쳐 이 베트남 영토를 자신의 영역에 편입하려고 베트남을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 3. 정치 체제와 쇠퇴

942년 유엄이 사망한 후, 남한은 계승권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다. 유엄의 셋째 아들 유분[6]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 유성[7]에게 살해되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다른 동생들까지 모두 살해하고 권력을 안정시켰다.

유성은 북쪽의 나라의 내란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이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는 등 나라를 부패시켰다.

958년 유성이 죽고 장남 유창(劉鋹)[8]이 계승했으나, 유창은 의심이 많아 문관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환관으로 채웠다. 유창은 등용하려는 인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세를 해야만 등용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환관을 중용했다.[3] 이러한 상황은 백성들의 불만을 샀으며, 결국 971년 송나라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남한의 정치는 오대십국 시대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문관이 주도하는 정치가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지방관은 모두 문관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이는 당나라 시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관료들이 이 지역으로 좌천되어 정착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남한 건국 세력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유은은 이러한 문관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남해 교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유성 대부터 환관이 중용되기 시작하여 유창 대에 이르러서는 환관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2. 4. 멸망

942년 유엄(劉龑) 사후, 남한은 계승권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다. 유엄의 셋째 아들 유분(劉玢|유분중국어)[6]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 유성(劉晟)[7]에게 살해당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다른 동생들까지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안정시켰다. 유성은 초나라의 내분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지만, 이후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고 부패를 조장했다.

958년 유성 사망 후, 장남 유창(劉鋹)[8]이 즉위했다. 유창은 문관들을 불신하고 환관들을 중용하여, 조정은 환관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971년, 송나라가 침공하자 남한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유창은 재물을 가지고 도망치려다 자신이 신임하던 환관에게 붙잡혀 송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고, 남한의 영토는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유창을 비롯한 남한 왕족은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으로 옮겨져 왕족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유창은 송나라에서 좌천우위대장군(左千牛衛大將軍)에 임명되었고, 사후에는 남월왕(南越王)으로 추봉되었다.

3. 역대 군주

남한의 군주 (917년-971년)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고조천황대제유엄917년–941년
없음상제유분941년–943년광천(光天) 941년–943년
중종문무광명효황제[1][2]유성943년–958년
후주없음유창958년–971년대보(大寶) 958년–971년


4. 정치와 환관

남한(南漢)의 정치는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오대십국(五代十国) 정권과 달리, 군인이 주도하지 않고 문관이 우월했으며, 지방관에는 모두 문관이 임명되었다. 그 이유는 당(唐)대(唐代)의 중앙에서 권력 다툼에 패배한 관료들의 유배지로 당시 미개척지였던 이 지역이 선택되었고, 유배된 후에도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러한 사람들의 자손들과 전란이 계속된 중원(中原)에서 피난 온 인사들이 남한 세력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성(劉晟) 때가 되면 환관(宦官)이 중용되었고, 환관의 수는 약 7,000명[3]에서 유성의 재위 말기에는 약 2만 명으로 증가하여, 전체 인구의 2%(성인 남성의 1할 가까이)가 환관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뒤를 이은 유규(劉鋹)는 많은 문관을 숙청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환관을 등용했으며, 등용하고 싶은 인물이 있으면 일부러 거세(去勢)한 후 등용했다고 한다. 송(宋)에 병합되었을 때는 7,000명 이상의 환관이 송군에 의해 구금되었다.

5. 가계도

wikitext

남한 황제 가계도
유지겸(유겸)
유은유염고조 (재위 917년 ~ 942년)
왕염준
류화
류홍창
(944년 사망)
월왕(越王)
유빈
상황
(재위 942년 ~ 943년)
유성
중종
(재위 943년 ~ 958년)
류홍고
(943년 사망)
순왕(循王)
유창'''
(942년 ~ 980년)
(재위 958년 ~ 971년)


참조

[1] 논문 南漢劉氏の祖先につきて http://id.nii.ac.jp/[...] 東洋文庫 1916-05
[2] 뉴스 劉復愚遺文中年月及其不祀祖問題 http://www2.ihp.sini[...] 中央研究院歴史語言研究所 1939
[3] 문서 인구 약 100만 명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도 인구 비율에서 보면 상당한 수이다.
[4] 문서 광동
[5] 문서 광동, 광서
[6] 문서 본명은 유홍도(劉弘度)
[7] 문서 본명은 유홍희(劉弘熙)
[8] 문서 본명은 유계흥(劉繼興)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